[사설] 엘리엇에 대한 정부 배상, 서두를 이유 없다

입력 2023-06-23 17:37   수정 2023-06-24 00:25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동반 구속 사태로 몰아넣은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에 배상금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유리한 조건으로 승계받기 위해 박 대통령에게 ‘묵시적 청탁’을 했고 삼성 측은 그 대가로 측근인 최서원 씨에게 승마용 말 구입비 등의 뇌물을 전달했다는 혐의로 촉발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는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행사해 합병이 성사되도록 도왔다는 것이 당시 수사를 맡았던 박영수 특검의 기소 요지다. 합병 관련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만남을 ‘묵시적 청탁’으로, 100원짜리 동전 하나 직접 받지 않은 대통령에게 ‘뇌물죄’를 인정하고 적용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거셌지만 대법원은 기소 혐의를 대부분 인정하고 재판을 종결했다. 당시 무리한 법 적용이라는 비판을 제기한 법조계 인사들은 이 재판이 자칫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으로 이어져 우리 정부가 낭패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내놓기도 했다.

이 같은 우려는 현실화해 지난 20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을 제기한 사건에 대해 지연 이자 등을 포함해 1300억원 상당을 배상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당초 요구 금액의 7%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선방했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국민 세금을 투입해야 하느냐, 아니면 범법 행위 당사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해야 하느냐를 놓고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이번 재판은 당초 우리 법원이 정부의 삼성 경영권 승계에 대한 부당 지원을 인정한 것을 깔고 이뤄진 것이어서 처음부터 불리하게 진행된 측면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엘리엇에 배상금을 지급할 것이 아니라 불복 절차를 밟는 것이 타당하다. ISDS는 단심제지만 결과에 대한 별도 소송은 가능하다. 관련 규정은 ‘중재 당사자는 관할 흠결, 절차 하자, 법리 오해 등을 이유로 법정 소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선고일로부터 28일 이내에 중재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를 통해 우선 엘리엇이 핵심 쟁점으로 삼은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정부의 불공정한 차별’이 있었느냐를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비록 국민연금 당시 수뇌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재판에서 인정됐지만, 실제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의 표결 자체는 독립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또 국민연금과 엘리엇 모두 삼성물산의 주주 신분인데, 특정 주주의 권리 행사(합병 찬성)가 반대 측에 결과적 손실을 야기했다고 해서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는 이의 제기도 가능하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정부의 조치’가 순수한 경제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또 이번 PCA 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엄청난 혈세를 투입해야 함은 물론 외환은행 매각 과정을 겨냥한 론스타 소송 등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다른 ISDS 사건에도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 엘리엇과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한 또 다른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탈도 우리 정부에 2억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다.

이번 사건을 보는 경제계는 불안하고 심란하다. 법이 정해놓은 주식 교환 비율대로 이뤄진 합병을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정경유착으로 무리하게 몰고 간 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주가가 아니라 측정 불가능한 주식의 내재가치를 갖고 합병의 적정성 여부를 따진 것도 그렇다. 법무부는 23일 “국민 세금이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부 대리 로펌 및 전문가들과 함께 판정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다짐대로 모든 ISDS 소송에서 국민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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